나오시마 / Naoshima

나오시마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일본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섬에 갇혀 하루종일 미술관 투어를 할 수 있다니! 섬에 위치한 제련소로 쇠락해가는 섬에 미술관을 여럿 세우고 다시 활기를 불어 넣는 모습이 무척 궁금했었다.

베네세에 하루를 숙박하진 못했지만, 자전거를 빌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섬에 머물며 새로운 충격을 만끽했다. 이제는 나오시마를 방문하기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한국으로 돌아와 베넷세 뮤지엄에서 요청한 서베이에 응하니, 나오시마의 스토리가 담긴 유튜브 링크를 선물로 받았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담아오지 못했던 곳들도 온전히 선물받은 느낌이다.

둥근 대리석 돌에 누워 콘크리크벽으로 둘러쌓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이 행복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주어진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온전히 소중하게 느끼는 방법을 기르쳐준 시간이었다.

돌아오며 무안에서의 사고 소식을 접했다. 누군가에겐 끔찍한 기억으로 얼룩졌을 하늘과 바람이었을텐데. 모두에게 지천으로 널린 공평한 하늘과 바람이었다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생과 사를 가르는 희미한 장막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첫 배를 놓치고 두 번째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전날 오카야마 시내가 아닌 우노에서 잔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돌아올 때는 오카야마가 아닌 다카마쓰로 들어갈 예정이기에 원웨이 티켓을 끊었다.



제련소 작업자들의 출근배 같았다. 고요한 선내에서 미술관 오픈 시간을 체크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에 나오시마에 도착했다. 거제에서의 출근길을 생각했다.



선착장에 놓여있는 Yayoi Kusama의 <붉은 호박>.



잠시 호박안에 들어가 강풍을 피해봤다.



저 멀리 보이는 <나오시마 파빌리온>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봤을 땐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든 메쉬 조형물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내부에 들어가보니 성김 메쉬망들을 용접해 만든 구조물이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지만, 아무나에게나 보이진 않는 아름다움을 구경한 느낌이었다.



아직 자전거 가게도 오픈하지 않은 이른 시간.



도보로 이동 가능한 미야노우라 근방을 구경다녔다.



오늘 투어를 다니며 식사가 애매할 것 같아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두기로. 이른 시간 오픈하는 카페에서 호밀빵과 커피를. 올리브유와 나오시마 소금에 찍어먹는 빵이 좋았다. 근처에 있는 코지마 진을 리폼해 카페 곳곳에 둔 것이 인상깊었다. 시간이 있다면 코지마 데님 거리도 가보고 싶었는데.



카페에서 죽치고 책을 읽는 것이 좀 미안해, 다른 카페에 가보려 일찍 나왔는데 연말 연휴때문에 다른 카페들은 모두 클로즈 상태였다. 바이크 렌탈샵의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서성였는데, 오픈을 준비하는 사장님께서 흔쾌히 빌려주셨다. 샵에 배낭도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라이딩을 시작했다.



바다를 보며 베넷세 에어리어로 넘어간다. 다른 섬들과, 다카마쓰까지 볼 수 있었다.



가장 이른 시간에 오픈하는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으로 시작한다. 안도 타다오의 콘크리트 사이에 피어난 풀잎들.



이번 나오시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야스다 칸의 1996년작 <The Secret of the SKY>. 통창의 큰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리석 두개가 놓여진 저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커다란 대리석 위에 앉거나 누울 수 있는데,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진 공간에서 온전한 너른 하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구름이 움직이는 것, 바람, 바람을 타고 날라온 낙엽. 이른 시간에 방문했더니 관람객이 없어 오랜 시간 동안 누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집을 짓는다면 반드시 이런 공간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일지라도 하루 중 온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는 시간이 얼마나 새삼 소중해졌다.



Bruce Nauman의 1984년작 <100 Live and Die>.



"*** AND DIE" 와 "*** AND LIVE"가 가득 쓰여 있는데, 랜덤한 순서로 하나씩 서로 다른 색의 불이 켜졌다. 작품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한참을 구경했다.



Jannis Kounellis의 1996년작 <Untitled>. Site-specific artwork로 베넷세 뮤지엄에서 작가에게 나오시마로 건너와 만들어달라 의뢰한 작품이라 한다. 나오시마의 해변이나 곳곳에서 구할 수 있는 폐기물같은 재료들로 만든 거대한 작품이었다. 미술관이나 섬과 생명의 궤를 같이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Zul Mahmod의 2024년작 <Quiet Resistance Manifesto>. 위의 야니스 쿠넬리스 작품 앞 공간에 가득 채워져 있는 작품이었다. 얇은 실이 천장과 바닥을 중구난방으로 연결해 두었는데 미세한 진동이 일고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실을 피해 이동하며 관람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Pannaphan Yodmance의 2016년작 <Aftermath>.



Haegue Yang의 2021년작 <Sol Le Witt Upside Down - Steel Structure, Scaled Down 10 Times>. 평범한 철제 블라인드의 아름다운 변모.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에는 야외 작품도 상당했다. Kazuo Katase의 1987-94년작 <Drink a Cup of Tea>. 처음에는 측우기같은 것인가 싶었는데, 바다를 향해 놓여있어 섬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차 한잔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라 한다.



걸어서 지중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수련>을 공간화 해놓은 작은 연못이 미술관 외부에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며 겨울 연못의 정취를 느꼈다.



지중미술관은 외부에서 입구로 들어가는 곳까지만 촬영이 가능하고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곳 역시 안도 타다오의 작품. 프레이밍된 하늘을 바라보며 입구를 따라 올라갔다.



지중미술관엔 정말 놀라운 작품이 많았다. 이 날 가장 첫 타임으로 입장한데다 관람 순서를 조금 비틀었더니, 대부분의 작품을 고요하게 홀로 관람할 수 있었다. 거기서 오는 무게가 더 좋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하지만. 모네의 수련도 좋았는데, 그 수련 5점을 전시해놓은 방 자체가 놀랄만큼 좋았다. 작은 돌을 촘촘히 깔아 벽과 천장과 바닥의 경계가 아리송한 톤다운된 순백의 공간에서 온전히 수련에 둘러쌓일 수 있었다.

제임스 터렐과 월터 드 마리아의 고정 전시도 놀라울만큼 경이로웠다. 제임스 터렐의 2000년작 <Open Field>는 체험형 전시였는데, 네 명 정도의 사람이 나란히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경계가 없는 벽을 따라 무한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중에 방문하게 되는 <이에프로젝트: 미나미데라>와도 연결이 되는 느낌이다.

제임스 터렐의 <Open Field>에서 무한한 공간을 경험한 뒤 이어지는 작품은 <Open Sky>인데, 하늘을 향해 사각의 창이 뚫린 공간에서 마음껏 하늘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보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시각인지, 혹은 마음에서 비롯된 센스인지 감각에 대한 혼란함이 몰려왔다. 정말 놀라운 시간이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으로 돌아왔다. 아까 시간이 일러 들리지 못한 뮤지엄샵에서 엽서도 사고



뮤지엄 카페에서 점심도 먹었다. 메뉴는 레몬 파스타. 언젠가는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에서 숙박을 하며 <Oval>까지도 제대로 보고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버킷리스트를 비우러 갔다가 또 채워버린다.



셔틀을 타고 밸리 갤러리로. 야외 설치 미술이 주를 이뤘다. 밸리 갤러리의 영구 설치 작품인 Tsuyoshi Ozawa의 <Slag Buddha 88-Eighty-eight Buddha Statues Created Using Slag from Industrial Waste at Teshima>.



그리고 잔디밭 곳곳에 놓인 쇠구슬들. 거기에 비친 자신을 찍는 사람들. 나도 열심히.



그리고 마주친 작품의 제목. Yayoi Kusama의 <Narcissus Garden>. 그렇구나. 한 번 네 나르시즘을 맘껏 느껴보란 것이었구나.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과 어우러지는 쇠구슬들.





호수에 놓인 쇠구슬들이 바람에 맞춰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밸리 갤러리를 떠나 건너편의 이우환 미술관으로 건너갔다.



바닷가를 향해 설치된 이우환의 설치 미술들.



이우환 미술관 역시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 유명한 페인팅 작품 7점 정도와 설치 미술들을 몇 점 가지고 있는 갤러리였다.



역시나 안도 타다오의 건축.



그가 추구하는 원론적인 요소들에 대해 좀 이해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요소들을 콘크리트와 철과 돌로 응축해 만든 정문 앞의 설치미술. 사실 전날 이우환에 대한 탐사보도를 본터라 기분좋은 관람은 아니었다. 이우환의 진짜 작품을 보려면 그의 이름을 딴 이우환 미술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는 안도감. 그런데 그 진품마저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아이러니. 좋은 센스를 가졌던 작가의 좋지 못한 선택들.



베넷세 에어리어는 자전거 출입이 금지라 아침부터 정문에 자전거를 주차해두고, 셔틀버스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돌아다녔었다. 이제 드디어 자전거를 타고 베넷세 에어리어를 벗어난다. 자전거를 타고 섬을 달리다 마주친 Kimiyo Mishima의 <Another Rebirth 2005-N>.



사실 자전거로 베넷세 에어리어에 들어갈 수 있다면 섬의 남동쪽으로 시계 반대방향의 일주를 하며 혼무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그게 금지되는 바람에 혼무라를 찍고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갔다. 기상 악화로 없어진 Yoyoi Kusama의 노란 호박. 나오시마의 상징같은 작품인데, 지금은 설치 구조물만.



콘크리트 바닥에 호박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재밌었다. 다음에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에 숙박할 때는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 야외 전시를 구경했다. 너른 들판 위에 멀찍이 설치된 작품들.



그 중 가장 신기했던 Dan Graham의 <Cylinder Bisected by Plane>.



내부에 들어가면 원통을 가로지르는 평면에 비치는 내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바다에 겹쳐지는 신기한 전시였다. 현실과 환상을 시각화해놓은 느낌이었다.



이번엔 시간관계상 가지 않은 히로시 스기모토 갤러리의 <Glass Tea House Mondrian>.



다시 자전거를 밟아 혼무라로 넘어왔다. 전기자전거를 빌렸는데, 일반 자전거였다면 반복되는 업힐 다운힐에 허벅지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혼무라의 공중 화장실.



안도 뮤지엄으로 향했다.



혼무라의 오래된 집을 본인의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해 리노베이션한 공간.



공간적인 즐거움도 있지만, 오늘 보고온 미술관들의 컨셉아트나 공사 진행 사항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지중 미술관도, 이우환 미술관도 건물이 외형적으로 보이지 않고 언덕에 파묻힌 형태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우환 미술관이 놓인 지형이 굉장히 재밌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애초에 설계부터 그 협곡같은 지형을 고려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영화 <미드소마>같은 새로운 세계를 마주칠 것만 같은 지형.



지중미술관의 모형. 작품에 맞춰진 공간. 그래서 더 유기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나보다.



공사가 진행되는 사진을 통해 이해를.



문득 지금 다시 생각하니 습기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지중미술관의 모네의 <수련>이 전시되어 있는 룸에 깔려있는 타일의 비밀.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의 전경. 역시 우하단의 Oval을 빼놓으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한 번 나오시마에 올 구실을 만들게 되어 기쁘다.



혼무라엔 나오시마의 오랜 목조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이에프로젝트>가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다음 관람 시간을 기다리며 카페에서 따뜻한 라떼와 레몬 케이크를 한 조각 사먹었다. 이 때쯤 무안 사고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느끼는 여유가 덧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혼무라에서 마지막으로 관람할 <이에프로젝트: 미나미데라>로 향했다. 여러 <이에프로젝트>가 존재하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이 있던 미나미데라만 관람해보기로. 역시나 내부에서 촬영이 불가했는데 굉장히 생경한 경험이었다. 내부는 불빛이 없어 굉장히 어둡다. 그래서 입장 전에 가이드분께서 내부가 어떤 구조로 생겼는지 간략히 설명해주시고, 어떻게 입장할 수 있는지 방향을 기억하게 한다. 약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줄지어 입장하는데, 벽을 따라 우회전 좌회전을 반복하다 두 그룹으로 나뉘어 양쪽 벽에 놓인 벤치에 앉게된다. 벤치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스크린의 약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무한한 공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약 10분 정도의 암반응 뒤에는 내가 바라만 보던 무한한 공간처럼 느껴지던 벽으로 걸어가볼 수 있다. 굉장히 멀게 느껴지던 꿈과 희망이 tangible하게 느껴지는 데 드는 시간이 고작 10분이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 암반응을 해가고 있는 것일까, 인생을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고 미야노우라로 넘어왔다. 고민을 하다 공중목욕탕 <I♥︎湯>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피로도 풀겸.



일반 목욕탕이다보니 마찬가지로 내부 촬영이 어려웠지만, 목욕이 끝나고 나와 리셉션은 찍을 수 있었다. 목욕탕 내부에서 사용하던 바가지.



그리고 샤워 용품들과, 코끼리.



공식 홈페이지에서 내부 사진을 퍼와 공유하자면.. 구조 자체는 일본의 일반적인 공중목욕탕인데, 그 인테리어가 정말 남달랐다. 남탕과 여탕 사이에 놓인 웅장한 코끼리상. 뜨거운 김이 온 목욕탕을 휘감고 있는데, 천장의 화려한 창문에 찬 물방울들이 고여 바닥으로 똑똑 떨어진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채 아주 생경한 경험을 했다.



비범한 목욕탕의 타일들.



그리고 외관. 단순히 예술적 공간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욕탕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목욕탕 외부 코너를 마감한 인테리어. 흥건한 물이 가득한 공간에 놓인 선인장이라니.



자전거를 반납하고 페리 터미널로 돌아왔다. 배 시간을 기다리며 기념품샵을 구경하다 마주친 나오시마 소금 아이스크림. 꽝꽝 언 것을 하나 사서 페리에서 야금야금 먹었다.



이제 나오시마를 떠나 다카마쓰로 향한다.



해가 뜨기 전 도착했다가 석양을 바라보며 페리에 올랐다. 마음이 한없이 올라갔다가 끝없이 추락하기도한, 롤러코스터 같았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