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 Hiroshima
12월 27일부터 1월 3일까지 7박 8일동안 추고쿠와 시코쿠 여행을 하고 왔다. 세토내해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총 4개의 현을 방문하는 여행이었다. 사실 2024년 가을로 예약을 마쳤던 여행인데 이런저런 일이 겹쳐 취소를 했었다. 연말 셧다운 기간동안 어디를 놀러갈까 고민을 하다,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다시 같은 루트의 여행을 예약했다. 이번을 놓치면 추고쿠, 시코쿠를 가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나오시마, 다카마쓰, 마쓰야마를 꿰는 루트를 이리저리 비교해보다 히로시마 IN 마쓰야마 OUT의 루트로 결정. 덕분에 히로시마와 마쓰야마를 잇는 시마나미 해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게 아쉽지만, 거긴 따로 떼어 다음에 제대로 여행해보기로.
히로시마를 방문하기 전까진, “원폭돔"과 “오코노미야끼"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었다. 동공대 오오카야마캠퍼스 근처 식당에서 아주머니가 해주시던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끼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기에, 현지의 맛이 궁금했다. 더불어 원폭돔의 처참한 풍경을 한번쯤은 눈으로 직접 보고싶단 생각이었다.
참 오묘한 도시라는 생각이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머물러서인지는 몰라도, 올 겨울에 방문한 센다이처럼 히로시마도 뭔가 서늘한 분위기가 서린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도시에 마음을 뺏기지 않아서 나도 이성적인 마음으로 도시를 관광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비행기였다. 덕분에 전날, <오징어 게임 2>를 달린 뒤 밤을 꼴딱 새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버스와 비행기에서 눈을 좀 붙이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편한 숙면을 취하진 못해 아쉬웠다. 착륙에 가까워진 시간, 창밖을 보며 히로시마는 꽤나 산악지형에 둘러쌓인 삼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부터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히로시마의 첫 인상은 “갈색"의 도시였다.
히로시마에 없는 히로시마 공항. 작은 공항이었다. 패스를 살지 말지 아직도 결정하기 전이었는데, 일단 패스 없이 그냥 도심으로 이동해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 내려 호텔까지 걸어갔다. 귀여운 노면 전차가 도심을 가르고 있었다.
호텔에 짐을 맡겼는데도 아직 점심 시간 전이었다. 생각보다 피곤하지 않아 미야지마섬까지 다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리나케 이동해 도심 구경을 마쳐보기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초입의 “평화의 문”.
다양한 언어로 “평화"가 적혀있었다.
사실 이 때는 한국어가 없다고 생각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이 날 일과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가기 전, 아쉬움이 남아 밤늦게 다시 평화의 문으로 향했는데, 그 때 이렇게 한글로 적힌 평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편협한 마음을 가진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고요…
공원 초입에 놓인 “폭풍 속 모자상”.
동상 뒷편으로 분수대가 작동중이었는데, 물줄기가 세서 멀리 있는 나에게까지도 물방울이 닿았다. 문득, 원폭도 이랬겠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기념자료관 내부로 들어섰다. 원폭의 영향력을 비주얼하게 표현해 놓은 전시.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 최근에 봤던 <파친코 2>를 생각했다.
사진 전시가 꽤 되었는데, 그 참혹함에 관람하는 그 누구도 사진을 찍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한국인에게, 히로시마 원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하는지 좀 머리가 아팠다. 다른 문제를 차치한다 해도,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서 꼭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은 결과론적인 문제로 귀결되지만, 그래도 그것만이 유일한 솔루션이었는지, 그저 숏컷은 아니었는지 그런 판단들이 궁금했다.
기념관은 건물 두 개를 연결해 놓은 형태였다. 건물 사이를 지날 때 창밖으로 원폭돔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방금 사진으로 봤던 세월이 무색해졌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와 투하된 팻 맨과 리틀보이의 모형. 사이즈를 가늠할 수 있게 비교해 두었다.
원폭돔의 이전 모습과 현재의 모습.
기념관을 빠져나와 공원을 걸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심지. 조준된 곳과 달리 실제로 폭탄이 폭발한 곳이라 한다. 너무나도 일상이 되어버린 폭심.
남길 것인가 없앨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내부는 추가적인 붕괴 위험이 있는지, 철골로 여러 군데를 덧댄 상황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생명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철원의 노동당사를 떠올리게 했다.
히로시마 도심을 벗어나 전차를 타고 미야지마섬으로 향했다. 학원 광고 같았는데.
전차에서 한 시간 정도 햇살을 받으며 나른하게 졸았다.
히로덴미야지마구치역에 도착.
페리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 바다위에 떠있는 도리이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히로시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고치나 시코쿠의 어느 섬인줄 알았는데. 여행 전 날 히로시마에 대해 좀 찾아보다 위치를 알게되었지만, 일정이 타이트해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보고가게 되었다.
섬에서 바라본 히로시마. 지형과 어우러지는 도시의 구조.
점심이 아직이라 무척 배가 고팠다. 일단 미야지마섬의 명물이라는 모미지 만주(단풍빵)을 하나 사기로.
맛은 상상되는 그 맛 그대로.
미야지마 오모테산도 상점가를 걸었다.
미야지마의 또 하나의 명물은 굴이라 했다. 길거리에서 파는 굴구이도 있었지만,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 페리를 타며 검색해놓은 집으로 들어갔다. 훈제굴절임과,
네 종류의 굴구이에 히로시마산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씨알이 굵어 질길 정도였다. 생굴이 없는게 아쉬웠다. 아무래도 아직은 날씨가.
마그넷을 샀다. 더 괜찮은걸 사고 싶었는데, 돌아다녀도 이 도리이가 최선이었다. 정세월드의 선택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튀긴 모미지 만주가 더 맛있다고 했던게 생각나 튀긴 단풍빵도 사봤는데, 조금 더 따뜻할 뿐 그냥 튀긴 맛이었다.
도리이를 따라 바닷가를 걸었다.
아쉽게도 간조 때 방문하게 되어 물이 가득찬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어 다른 의미로 좋았다.
아참, 미야지마섬에는 사슴이 길고양이처럼 돌아다녔다. 이 아가같은 녀석이 멀리서부터 말처럼 달려오더니 사람 키보다 높은 담벼락을 뛰어넘어 나에게로 다가와 화들짝 놀라는 순간이 있었다. 사슴의 속도와 점프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섬이 큰데다 전체적으로 험준한 산악지형이라 전체적으로 돌아다닐 순 없었지만, 선착장에서 걸어서 갈만한 곳들을 구경다녔다. 오래된 절과 신사를 보고있자니 섬의 옛 모습이 궁금했다. 옛날 옛적에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생각이었을까.
미야지마 브루어리로 향했다.
굴 스타우트라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샘플러로 시켰는데, 종이컵보다 작은 사이즈의 양은 무척 아쉬웠지만 재밌는 맛이었다.
생각보다 고퀄의 굴 인형.
미야지마의 명물 중 하나라는 구운 어묵도 하나.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면, 히로시마도 섬이지만ㅎㅎ
이렇게 술술 풀리는 하루라니, 여행이 그리고 인생이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시원하다 못해 쌀쌀하기까지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갑판에서 석양을 구경했다.
전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며 저녁의 계획을 간단히 세워봤다. 그러다 지도에서 발견하게된 “비어스탠드 시게토미"라는 이상한 맥주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미 웨이팅이 가득이었다.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시는 업장인데, 쇼와 시대 때부터 사용하는 비어탭을 이용해 맥주를 따라주신다. 모두 스탠딩석이고, 인당 두 잔까지 주문 가능, 20분의 이용 제한 시간이 있다. 맥주의 종류가 몇 가지 되는데, 모두 같은 아사히 생맥을 사용하지만 따르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했다.
아직 웨이팅을 하면서. 나중에 함께 테이블을 쓰게된 중년의 히로시마 분들(부부이신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이전 직장 동료였던)께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싱글탭은 저 자세로 원샷하듯 털어넣어야 한다 한다.
입장과 동시에 첫 잔을 주문. 싱글탭. 모래시계가 흐르고 있다. 크리미한 거품이 산뜻했다. 두번째 잔은 트리플탭으로 마셨는데, 정말 그 맛에 차이가 있어 놀라웠다. 같은 맥주인데 좀 더 쓴 맛이 난다. 시간차가 생긴 탄산때문일까?
짧은 일본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마시고 나왔다. 5시에 열어 7시에 닫아 하루에 딱 2시간만 운영하는 업장이, 맛있는 맥주로 대단한 회전율을 유지하는 법에 감탄했다.
오코노무라 (오코노미야끼 마을).
7층짜리 오코노미야끼 식당가인데, 생각보다 복작복작해 구경만하고 나왔다.
대신 길을 걷다 마주친 작은 오코노미야끼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오랜만에 먹는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끼는 사실 그저 그랬다. 추억보정이 심했던건지, 그 집이 맛있었던건지. 아니면 그 때 함께 오코노미야끼를 나눠먹던 아오툴 친구들이 그리운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