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스토리

★ 3.9

85년작의 한국 첫 개봉이었다. 하나 그리고 둘을 너무 재밌게 본 터라 꼭 봐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러가기 전 마치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에 일이 잘 잡히지도 않았다.

차가운 내용을 담는 따뜻한 빛과 공간의 배색이 놀라웠다. 가령 수첸이 처음 이사가려는 집을 둘러볼 때, 흰 벽이지만 빛때문에 회색에 가까운 공간에 걸어오는 아이보리에 가까운 화이트로 맞춰입은 투피스 바지 정장과 멋드러진 선글라스도 좋았지만 인물이 퇴장하고나서 그 공간은 그대로 남고 왼편에 떠오르는 흰색의 오프닝 타이틀은 정말 기가막힌 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85년도에도 컬러리스트가 있었던걸까? 아님 멋진 센스를 가진이가 스탭이었던걸까. 어디까지가 에드워드 양 감독의 솜씨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오프닝이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두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내내 전반적으로 그 색감을 유지하는 뚝심이 좋았다. 논문이 리젝되든 억셉이 되든, 이 영화를 넣어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장 좋았던 것은 촬영이다. 가령 인물이 문을 넘어 공간으로 들어올 때 사선으로 비딱하게 바닥을 비추다 서서히 인물을 따라 올라가는 샷이라든가, 문밖에 찾아온 사람을 맞이하러간 주인공을 카메라가 따라가지 않고 카메라는 여전히 방 안에 남아 주인공과 찾아온 이의 그림자가 진 벽을 찍고있는 샷들. 정적인 카메라가 어떻게 해서 동적인 카메라보다 더 파워풀하게 감정을 담는가를 배우고 온 느낌이다. 무척많은 문이 닫혔다 열리고, 열려있다. 우리의 마음들 같았다. 좀만 더 열어놓고 기다리면 되는데.

대만에서는 ‘청매죽마’라는 오래된 인연이자 연인의 제목으로 개봉을 했다지만, 우리나라엔 영문명인 ‘타이페이 스토리’가 그대로 들어왔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 타이페이 스토리라는 제목이 영화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긴자 가라오케에서 엔카를 부르고, 후지필름 전광판과, LA, 남가주. 영화 곳곳에 숨겨놓은 잔잔하게 일어나고 있는 격동과 숨바꼭질하는 것만 같았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주연을 맡았다거나, 주연 여배우인 채금이 영화 촬영 후 에드워드 양 감독과 결혼을 했다는 것, 그 채금이 영화 무간도에서 양조위가 유덕화가 쇼파에 앉아 진공관에 감탄하던 피유망적시광(被遺忘的時光; 잊혀진 시절)의 가수라는 것. 뭐 그런 사실들이 줄줄이 따라나오며 영화가 끝나고도 끊어져 존재했던 연결고리들을 채우는 기분이 좋았다.

4K로 리마스터링되어 영상 복원 상태는 무척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 빈 사운드가 좀 아쉬웠다. 단 하나의 흠결같달까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너무 보고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