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
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 / 주성철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를 빌리러 간 김에 주성철 기자의 첫 영화평론집도 빌려왔다. 다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추석 연휴를 만나 끝냈다.
쉽게 쓰인 평론이지만 내용까지도 쉬운 것은 아니다. 같은 생각을 했던 부분에 있어서는 무릎을 치며 공감했고, 몰랐던 부분은 왓챠피디아에 마킹을 하며 재밌게 읽었다. 기자와 평론가, 영화 방송인 같은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놓여져버린 그가 내놓은 정체성에 대한 대답.
평론가가 배우나 감독과 친밀함이 생기며 할 수 없게된 비평, 대신 더 크게 할 수 있게된 감동에 대해 생각했다.
좋았던 부분을 남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화가 좋아지는 기적과도 같은 경험을 하길 바라진 않는다. 다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면서 “이렇게 보니 영화가 더 재미있네"라는 식으로, 영화를 좀 더 쉽게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기쁜 것이다, 라고 쓰고 보니 그게 더 어려운 경지가 아닌가 싶어 말해놓고도 식은땀이 난다. 어쨌건 근본적으로 영화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중략)
아무리 스마트폰 영화가 가능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많은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되는 철저한 공동 작업의 시청각 종합예술이다. 연출자의 창의력과 스태프의 기술력이 더해질 때 영화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그들이 조화를 이뤄 애초의 의도를 정확하게 담아낸 장면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감독의 집중력과 스태프의 기술력, 그리고 배우의 컨디션이나 현장의 날씨 등 그 모든 미완성인 것들이 모여 마치 완벽하게 연출된 것인 양 관객을 유혹하는 게 영화다. 난 근본적으로 미완성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마치 제대로 완성된 것처럼 너스레를 떨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예술의 속성이 매혹적이면서도 때로 귀엽다. 그리고 100년 넘는 영화의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든 그 틈새를 채우기 위한 안간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
한편으로 비스콘티를 미의 창조를 예술의 최고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사조인 유미주의의 대가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해외 비평 등에서 박찬욱을 비스콘티의 후계자로 묘사하는 글을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박찬욱의 영화에는 유미주의적 성향과 더불어 동전의 양면처럼 특유의 불균질한 B무비 정서가 결합한다. 가령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이 유괴범에게 갖다줄 돈을 차로 가져가며 그 돈 가방에 안전벨트를 맨다든지, <올드보이>에서 느닷없이 오대수(최민식)가 산낙지를 먹으며 괴로워한다든지, <친절한 금자씨>에서 기어이 백 선생(최민식)의 CG 개 이미지나 또 다른 거대 CG 개미를 등장시킨다든지, 역시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가 흰색 케이크를 거대한 두부 이미지로 만들어 스스로 머리를 처박는다든지, 아무튼 그는 영화가 한 방향으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을 못 견디는 사람처럼 그런 장면들을 지뢰처럼 숨겨두는 것을 즐긴다. 박찬욱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세 감독이 히치콕과 비스콘티와 김기영이라면, 그것은 단지 B무비 정서를 넘어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독특한 거리두기를 즐겼던 김기영 감독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박찬욱: 가장 심오한 인간 욕망의 예술적 발현>
바닷가에 다다른 서래는 마치 <미쓰 홍당무>(2008)의 양미숙(공효진)처럼 양동이로 삽질해서 그 안에 들어가고 심지어 소주까지 마신다. (중략) 앞서 사철성(서현우)이 서래를 감시하기 위해 사용했던 위치추적기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마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스스로 두부 모양 케이크에 머리를 박아 속죄한 것처럼 서래는 속죄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사라지길 결심한다. 사랑하는 해준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로그아웃된다. 해준은 애타게 서래를 외쳐 부르지만 결코 서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혀를 잘라 진실을 봉인한 <올드보이>의 대수처럼 서래도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하면서 그 진실의 주체가 된다. 그처럼 박찬욱은 <올드보이>를 만든 후 고백했던 그 ‘꺼림칙한 마음’에 대한 참회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가 한 명의 영화감독으로서 정말 대단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는 매 작품 임할 때마다 자기 자신과 이전의 작업을 의심하며 그 스스로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직업인으로서의 영화감독에게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박찬욱: 가장 심오한 인간 욕망의 예술적 발현>
공포 영화에 대한 인식이 현전하게 낮은 탓에 제작진은 <여고괴담>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을 숨기고, ‘아카시아’라는 제목의 청춘영화로 학교 공간을 섭외하러 다녔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여고괴담> 기획서를 최초에 썼던 오기민 PD는 과거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 누구나 ‘죽여버리고 싶었던 악질 선생이 한 명쯤 있었다’는 공통된 기억을 갖고 있는 것에 착안했다. 학생이 선생을 죽이면 문제가 될 것 같은데 ‘학생이 아니라 귀신이 선생을 죽이면 말이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이야기의 출발이었다.
<한국 공포영화: <여고괴담>과 <알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