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 삶과 창조의 지평
유영국 삶과 창조의 지평 / 오광수
기승전결이 담긴 평론이었다. 251 페이지의 다소 얇은 평전임에도 대학 교재를 읽은 것처럼 빽빽하게 다가왔다. 단순히 유영국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광복 전후, 그리고 현대로 들어서는 대한민국의 미술사를 훑고 온 기분이다.
그의 작품이 무제로 일관되었던 이유를 미약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앞으로 제목이 없는, 그리고 제목이 있는 작품까지도 어떻게 접근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감을 잡았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자연에의 비구상. 액자에 담긴 작품을 또 다른 세상으로의 문으로 생각한다면, 그간 눈치채지 못했던 커다란 세상이 열려버린 느낌이다.
유영국 화백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작품 그 자체이지만, 작품을 떠나 어떤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회귀하게 된 것은 한 문장으로 다듬어지지 않는 추상적인 이유였다. 책을 읽고난 뒤에야 비로소 정리가 된다. 어쩌면 그는 지난 후회에 스스로를 함몰시키지 않고, 스스로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과묵하게 자신에 대한 탐구를 지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결론지었다. 무엇을 그릴 지가 아니라 왜 그리는 지를 생각했던 그를 모델 삼아 나는 어떤 일상들로 나의 인생을 쌓아가야 할 지 숙제를 받았다.
오광수라는 평론가를 바라보는 미술계의 시각이 궁금하고, 오광수라는 평론가가 쓴 다른 이들의 평론이 궁금해진다.
좋았던 구절들이 너무 많아 책을 살까도 고민했지만. 나름대로 갈무리하여 덧붙여 본다.
ㅤ예술가는 대체로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천재성과 노력형이 있는가하면,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예술가와 청교도적인 삶의 행적을 지닌 예술가가 있다. 이중섭이 천재형에 속한다면 박수근은 노력형의 대표적인 경우로 꼽을 수 있다.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대표적인 예술가로 고흐를 드는 데 이의를 제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생에게 심한 굴곡 없이 금욕적인 삶을 산 예술가로는 동시대의 세잔을 떠올리게 한다. 이 대비적인 타임에 적용시킨다면 유영국은 청교도적인 삶을 산 세잔에 비견할 수 있을 듯하다. 비교적 굴곡이 심한 생애를 기록한 김환기를 대비적으로 생각 할 수 있다.
ㅤ김환기와 유영국은 동시대의 작가로 비교적 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김환기가 비록 파란만장한 삶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변화로 정찰되어 있는 반면, 유영국은 비교적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삶을 영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환기가 전남 천안 안좌도(가좌도)에서 서울로 진출하고, 다시 동경에 건너가 미술 수업을 받는다. 서울로 다시 돌아와 피난시절(부산)을 겪고 상경, 곧 도불하여 3년을 파리에 체재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뉴욕으로 건너가 여기서 작고 할 때 까지 정착하게 된다. 한 곳에서 안주한 것이 뉴욕 10년을 제외하면 3년을 주기로 이주를 거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하면 유영국은 고향 울진에서 상경, 그리고 도일하여 수업기와 데뷔기를 거친 후 귀국, 울진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한 비교적 안정된 행적을 나타내고 있다.
ㅤ김환기가 이상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유영국은 보다 현실적인 성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이중섭이 이상주의적 타입이라고 한다면 박수근이 현실주의적 타입이라고 할 수 있듯이 말이다. 유영국이 가족들을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전력투구한 것은 박수근이 가족들을 위해 피엑스에서 온갖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미국들의 초상을 그린 사례와 닮은 점이 있다.
ㅤ생애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고흐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생애를 걸쳐 이렇다 할 스캔들 없이 오직 자신의 예술에 전체를 던진 세잔은 미술가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한 편이다. 드라마틱한 삶의 역정을 지닌 이중섭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처럼 자신의 삶을 영위한 박수근은 그렇게 회차되지 않는다. 김환기기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반면 유영국은 여전히 일반에게는 생소한 편이다.
p.13, 추상의 길
전문: http://www.yooyoungkuk.org/bbs/?so_table=review&mode=VIEW&num=34&PHPSESSID=78eb7cff5d289fabee6004e31cac768a
ㅤ"회화"는 회화 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해 주는가 하면, “직선 있는 구도"는 직선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순수추상의 관념에서 약간 탈피해가고 있다. 다음 단계 “산맥"이나 “나무"로 왔을 때는 순수화면에서 구체적인 자연에로 회귀되었음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산맥이나 나무가 자연형태를 그대로 표출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명제는 구체성을 보이는데 정작 화면에선 대단히 암시적인 형상만이 남아있다. 이 점은 그의 작품의 직접적 모티브가 산이나 나무와 같은 자연 현상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반적 사실주의의 영역은 아니란 것이다. 여전히 산이나 나무란 명제가 없다면 일반인들에겐 단순한 구성적인 질서로의 화면, 즉 추상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산이나 나무란 명제가 있기 때문에 산이나 나무를 유추할 수 있을뿐이다. 이 점은 김환기나 장욱진이 아무리 대상을 요약하고 거의 추상적 관념에 이르도록 환원적 요소를 보이지만 일반인들에겐 그것이 다소 다듬어졌거나 변형은 되었어도 구체적인 지시의 어떤 대상임을 금방 알아보게 되는 것과 차별된다.
p.77, 1916-1945 신사실파와 유영국
ㅤ부산에 다녀와서, 신사실파전에 출품할 작품을 위해 양조장 한 켠 쪽방에 임시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틈틈히 제작에 임했던 점에서 현실과 작가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려고 했던 그의 의식은 얼마나 치열했을까를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쟁의 소용돌이,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나 비껴온 그가 각박한 현실속에서 자신에게 지워진 생활인으로서의 의무가 부단히 작가의식을 밀쳐내고 있었을 때 부산으로의 두 차례 나들이가 이를 극복해 준 계기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료들과는 동떨어진 그가 그나마 창작을 통한 유대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동인전에의 동참이었다. 그가 울진으로 돌아오면서 구차하기 짝이 없는 양조장 한쪽 구석방에서 제작에 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동료들 속에서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작가로서의 의지를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부산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시골에서의 양조장 사업에 만족해 버렸다면, 그래서 양조장 사장으로서 부도 쌓고 나름의 지방 유지로서 자족했더라면 아마도 작가로서의 유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을 하던 사람들이 이처럼 어떤 계기에 의해 생활인이 되는 경우, 대부분 거기에 안주해버리는 예가 많다. 안정된 생활과 유복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끊임없이 현상에서 탈피하려고 했던 것, 동료들이 활동하는 서울로의 진출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두 차례 부산을 오가면서 만났던 동료들과의 해후와 어려움 속에서도 창작의 불씨를 꺼지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동료들의 처연한 상황을 목격하면서였을 것이다.
p.110, 1945-1955 피난시기의 작품들
ㅤ그의 궤적은 의식하고 행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있고 즐거운 비전이 있다. 그의 조형은 구성하여 쌓아올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경지에 이른 높은 눈이 자아낸 추상의 공간이었다. 형상엔 설화성이, 색감엔 생생한 감동이 가득차 있다. - 김영주
p.133, 1955-1963
ㅤ50년대 후반이면, 6.25 동란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직도 커다란 그림자로 우리를 덮고 있었던 시대이며 인간의 생존의 조건에 대한 치열한 자성이 요구되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실존주의가 풍미한 것도 이 같은 시대적 조건에 의했음은 물을 나위도 없다. 미술계에서도 실존주의가 절실한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곧바로 창작의 물음으로 이어졌다. 무엇을 그리냐가 문제가 아니라 왜 그리냐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한 물음은 창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ㅤ왜 그리냐는 문제 제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화가란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로서 말이다.
p.177, 1955-1963 “회화"에서 “산으로”
ㅤ1회 개인전 이후, 그의 작품은 “작품” 아니면 “산"이란 명제에 관계없이 그것들이 자연에의 감동, 또는 자연을 관조하는 데서 나온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연대상을 해석하는 방법의 진전이 아니라 자연에서 받은 감동이 오랫동안 내면에 축적되었다가 서서히 밖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자연을 바탕으로 하여 순수한 추상적인 상태를 형상화한다’는 그의 언급은 이를 적절히 시사해주고 있다. 후반으로 가면서 그 형상화가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가가고 있으나 애초에 이미지의 분석에서 시도된 추상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관조의 세계란 일종의 달관의 세계, 완성을 지향하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p.225-226, 1963-2002 장미의 세계
ㅤ58년에서 6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영국의 화면도 두터운 마티에르로 뒤덮혔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안료의 쌓아 올림은 밖으로 쏟아지는 형국이기보다는 내면으로 응축되는 밀도를 지닌 것이었다. 마치 화강암의 표층과 같은 견고한 집적이었다. 그것이 68년으로 들어오면서 두께는 사라지고 더욱 평면에 밀착되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p. 233, 1963-2002 또 하나의 변혁
ㅤ아무 눈치도 보기 싫어서 그림을 택했는데 지금 내가 누구 눈치를 볼 것인가하고 자주 말했다. 이 말은 그가 그림을 선택하였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이기도 한다. 그리고 보면 그의 주도한 이념에의 의지도 창작에 자신의 전부를 던질 수 있었던 용기도 그것이 자유의 획득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ㅤ그의 90년대 이후 만년의 작품은 흔히 달관의 경지라고 하지만, 그리고 자연에 대한 순화된 정감의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긴장을 늦춘 적이 없었다. 어쩌면 긴장 자체가 자신을 자유롭게 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가장 자유롭게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ㅤ"60세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고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했었다. 현재 나에게는 노인으로서의 노년의 흥분이 좀 더 필요하다. 요즈음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p. 237, 1963-2002 만년, 자유와 긴장
ㅤ내가 대상으로 한 것은 자연이었고 그것을 탐구해온 형태는 비구상을 바탕으로 한, 즉 추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물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선이나 면이나 색채, 그리고 그런 선과 면과 색채 들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서의 자연이다. - 유영국
p. 239,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