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 Yoo Youngkuk
유영국 Yoo Youngkuk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 화백은 우리 나라의 화가들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작품 뿐만이 아니라 작품을 그려낸 과정과, 그 작품을 그리기까지의 일생을 모두 존경한다.
유영국 화백 타계 10주기를 맞이해 발행된 도록인데, 충남대 도서관에서 빌려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필 또 라섹을 하게되는 바람에 빌려놓고 읽지 못한 채 반납하게 될 줄 알았는데, 기가막히게 시력이 돌아와 냉큼 볼 수 있었다.
미술에 정통한 동시대를 살아왔던 이들이 유영국 화백을 회고하는 글들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한 작품들은 대다수 6-7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이라 생각했는데,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작품들 역시 무척 좋았다. 그 집념과 열정이 정말 놀라웠다.
내가 매진할 것에 대한 확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유영국 화백이 가족을 위해 잠시 미술을 떠나 어업과 양조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 퍽 좋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타인의 완전한 희생이 아닌 자신의 희생이 뒷받침되는 자아실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혹 4-50년대 가계를 위해 미술을 놓고 생업에 뛰어들었던 그 시기가 그를 더 화가로서의 정체성에 몰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이건 다른 책들을 마저 읽어봐야겠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화단은 앵포르멜이라는 뜨거운 추상미술이 풍미하는데, 이 격정적인 표현의 물결은 젊은 세대뿐 아니라 기성세대에도 깊은 감화를 준 것이 되었다. 그러나 유영국의 유연한 변화의 진행은 시대적인 현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독자성을 지탱해나갔다. 변화의 요인을 밖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았기에 작품의 변화는 돌연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결과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점이야말로 개성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준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p.31, 추상적 형상과 색면의 구성: 유영국의 작품 세계, 오광수 (미술평론가)
1968년 한국 현대미술이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되었다. 국립 동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이었다. 여기에 출품한 유영국의 작품은 이전까지의 유동적인 구성이 기하학적이고 보다 정제된 구성으로 변모되고 있다. <원>과 <산>으로 명제된 작품은 원과 삼각이란 환원의 형태로 나타나 이전의 격정적인 구성은 엿볼 수 없다. 원을 자연 대상으로서 태양으로, 삼각으로 나타나는 형상을 산으로 보려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태양이나 산이 아니라 원이나 삼각형으로 굴절된 태양이나 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언급은 이에 대한 해석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고 있다. “자연을 바탕으로 하여 순수한 추상적인 상태를 형상화한다.” 자연에서의 영감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자연을 재현한 것은 아니란 점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태양을 환기한다거나 산을 연상하는 것은 보는 이들의 자유로운 접근이지만 작가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종래에 남는 것은 절대한 추상의 형상일 뿐이란 것이다.
p.33, 추상적 형상과 색면의 구성: 유영국의 작품 세계, 오광수 (미술평론가)
한치읭 빈틈도 보이지 않던 치밀한 밀도와 터질 것 같은 내면의 폭발의 기운은 잠재워지고 화면은 그지없이 부드러운 순화된 색채와 구성으로 이어지면서 편안한 시각을 유도해준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언제나 화폭 앞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현재 나에게는 노인으로서의 노년의 흥분이 좀 더 필요하다. 요즈은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술화는 노년의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기보다 전 생애를 통한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말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전 <자유전>에서의 일련의 실험에서부터 해방 후 ‘신사실파’와 50년대의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64년 이후의 개인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밀도에 차 있는 것이었으며 어떤 타협도 수용하지 않는 절대한 세계로의 지향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에 엄격하였다. 노년기에 접어든 80년대나 90년대에도 이 긴장은 늦추어지지 않았다.
유영국만큼 일관된 자기 세계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정신의 불꽃을 피운 작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화면 앞에서 만나는 긴장감은 자기 완성에로 향하는 조형을 통한 한 구도자의 정신의 희열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34, 추상적 형상과 색면의 구성: 유영국의 작품 세계, 오광수 (미술평론가)
늘 주거공간과 작업 스튜디오가 같은 집에 있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아침 8시면 자리를 살림공간에서 작업실로 옮겼고, 정오가 되면 거기서 나와 점심식사를 했으며, 다시 저녁 6시까지 어김없이 일하는 기계같은 습관을 코드화하며 평생을 노동자같은 화가로 살았다. 그런가 하면, <국전>을 거부하며 <50년 미술협회전> 창립에 나선 그에게 당시 학장인 장발(1901~2001)로부터 전시 참여와 국립 서울대 미대 교수 사이에 선택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거침없이 직장을 버리고 작가로서 전시 참여를 택했다. 1965년에 취임한 홍익미대 교수 자리도 애초의 약속과 달리 과다하게 작업 시간의 희생을 요구받자 4년 만에 단호하게 내던지고 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화가로서 자리매기는 데에 단호했으며 자신의 화업을 훼손시키는 외적 유혹이나 명예, 권력 돈 같은 어떤 세속적 가치에 종속되기를 거부했다.
p. 278, 자유 정신과 자연을 향한 ‘랩소디’, 이인범 (상명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