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 키린의 말
키키 키린의 말 / 고레에다 히로카즈
7월엔 다 읽을 거라 생각하고, 이 페이지를 7월에 만들어 두었는데 결국 8월이 돼서야 끝냈다.
도서관에 누가 이미 구매 신청을 해두었던지라 빠르게 예약하고 빌려 볼 수 있었다. 책을 넘겨받는 순간 책 뒷 표지를 한참 구경했다. 이 책을 그냥 넘기지 말고 꼭 읽으라는 강력한 선전포고 같았다.
고레에다 감독에게는 10년을 wrap-up 하는 연서이자, 키키 키린에게는 지난 60년의 연기 인생의 회고록이었다. 짧은 인터뷰나 메이킹에서만 드러나던 생각들을 조금 구체화시키는 느낌이기도 했다. 무척 어려운 내용이지만, 무척 쉽게 읽혔다. 고레에다 감독에겐 그런 글재주가 있다.
잡지에 연재되었던 키키 키린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인터뷰를 담고, 각 인터뷰에 대한 고레에다 감독의 일화 또는 생각을 담았다. 더불어 각 인터뷰마다 엄청나게 방대한 레퍼런스가 달려있어 계속해 watcha와 google map을 펼쳐놓아야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순간,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영화에 어머니로 캐스팅하며 이어진 인연. 단순히 그 인연 때문에 10년이란 시간이 지속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캐스팅 매너리즘에 빠진 것도 아닐 것이다. 감독과 배우로서의 케미가 무척 좋았다고 생각한다. 둘 모두 인간을 궁금해 하는데, 한 사람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본질에 다가가고, 한 사람은 경계를 지키며 그들을 모사한다. 서로가 “앗!” 하고 놀랄만한 어떤 포인트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코멘트를 날리거나, 그 코멘트를 직접 실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그 코멘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품에 반영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한 가득 선물받을 수 있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영면하소서.
좋았던 구절이 정말 많았다. 몇 개를 남겨보자면.
마음이 따라오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재미없거든.
서문에서
실제로 개봉 후 홍보차 오사카에 갔을 때 신문기자분께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을 조금 더 묘사하려는 생각은 없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저로서는 아들이 본가 욕실에서 더러워진 타일과 새 안전 손잡이를 발견하는 장면에 씨앗을 하나 뿌려두었으니, 그 장면이 관객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늙어가는 과정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죠. 처음에 뿌려둔 불안의 씨앗을 봤으니 그 뒤 암만 건강한 아버지, 어머니를 봐도 뭔가 마음에 걸리잖아요. 저는 그거면 됐을 듯했어요.
p. 23, <걸어도 걸어도>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
내가 맡은 이모할머니 역의 대사 중에 세 자매한테 “저 애는 너희 가정을 깨트린 사람의 딸이야"라고 말하는 게 있었잖아. 그것과 짝을 이루는 대사가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내 가치관 가운데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사실을 하나씩 확인해나가는 게 사람 아닐까’라는 게 있어서. 예를 들어 세상에는 ‘첩’이라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매력이 사라지는 건 남의 남편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떠벌리는 시시함을 보일 때거든.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있는 편이 훨씬 매력적인데 말이지. 나한테는 부인과 애인 둘 중 어느 한쪽이 좋거나 나쁘다는 게 없어서, 부인에 대해서는 ‘당신, 남편이 애인을 만들 정도의 아내였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는 생각이 분명히 있어. 하지만 애인이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연히 가정이 있었던 거예요"라고 큰소리로 말하면 ‘아, 시시한 인생이네’ 싶거든. 그게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세 자매가 배다른 여동생을 맡는 대목과 겹쳐졌어. 오후나의 이모할머니 입장에서는 “그 애한테 죄는 없지만, 그런 과거를 걔가 짊어지고 있다는 건 잊지 마” 하는 거지. 아무리 어린애라도, 혹은 어른이라도 ‘없었던 셈 치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이 시시해진다는 뜻이거든요.
p. 37,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한 키키 키린의 말
<걸어도 걸어도> 때는 “난 감독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게 아니야"라고 선언했고, 나도 “물론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크랭크업 직전에 이르러 “사진 한 장만 보여주지 않을래?” 라고 해, 내가 자란 기요세의 아파트 단지에서 아버지와 두 분이 나란히 찍은 흑백사진을 보여드렸다. 그뿐이었다.
p. 168, <걸어도 걸어도>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
<걸어도 걸어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곧바로 쓴 각본이라서 쓸 때도 찍을 때도 어머니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봤더니 아버지에 대한 영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로축을 잇는 건 늙은 아버지, 죽은 형, 피가 이어지지 않은 아들이었다.
p. 169, <걸어도 걸어도>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
추도문에도 썼지만 이날 헤어질 때 휠체어에 앉은 채 키린 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 할머니는 잊고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젊은 사람을 위해 써. 난 더 이상 안 만날 테니까.”
p. 321, <어느 가족>의 무대 인사가 끝나고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존재가 보편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잃은 뒤 오히려 어머니의 존재를 온갖 것 속에서, 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슬픔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언니이자 할머니인 당신을 잃은 유족분들의 슬픔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이 깊을 테지요.
p. 338, 키키 키린을 위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추도문
사랑해야 할 대상이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재’를 그립게 여긴다. 이 ‘그리워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불행한 체질의 인간이 작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이제는 수신되지 않는 ‘연애편지’일 것이다.
p. 345,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책을 마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