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라디오
그래서 라디오 / 남효민
2020년, 좋은 옆엽을 보내고 싶었다. 옆엽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어쩌면 라디오 프로그램과 닮아있다 생각했다. 여러 굵직한 프로그램을 거친 남효민 작가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라디오 프로그램 만드는 이의 일상과 생각이 궁금해 구매를 신청했고 장장 몇 개월에 걸쳐 읽었다.
쉽게 읽히는 글인데도,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틈틈이 읽어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 어느 에너지가 넘치는 토요일, 날을 잡고 집에 쌓인 책들을 없애야 겠단 생각을 해 제일 먼저 없애버렸다. 읽다 잠들어버려, 아침에 일어나 마저 읽어야 했지만.
가벼운 글이나 일상적인 글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좋지 않은 것 같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보며, 중간에 책을 그만 두는 용기에 대해 배웠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더 가벼운 책은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은데, 매번 같은 실수의 반복을 하는 느낌. 뭘까.. 어떤 점이 박완서의 글은 읽으면 읽을 수록 행복하게 만들고, 다른 글들은 그렇지 않을까. 가벼움과 깊이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클릭비의 영스나 김동완의 텐텐, 정지영의 스위트뮤직박스, 김동률의 뮤직 아일랜드, 윤성현PD의 심야식당. 요즘은 클래식FM을 주로 듣지만, 분명 나의 어딘가에도 중학생 때부터 들어온 라디오 인자가 새겨져있음이 분명하단 생각을 했다. 청취자가 눈에 잡히지 않아도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한 그들의 꾸준함에,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보내고 싶다.
변명인 듯 변명아닌 변명같은, 시시콜콜한 농담따먹기의 글이 분명 필요하지만 요즘의 나와는 맞지 않는다. 뭘 읽어야 할 지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몇 구절.
p. 31
카피라이터 김민철의 이 글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다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엔 있다. 효율로만 평가하려고 하는 이 세상에 비효율로 남아서 고마운 것들. 우리를 간신히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사실 그런 비효율들이다.’
당신 창고는 다 비어도, 내 창고는 그득히 채워주는 사람. 당신은 다 손해보더라도, 나만 좋으면 그걸로 전부인 사람, 당신 마음 부서져도, 내 마음 안다치면 그만인 사람.
p. 11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중략)
다가오는 행운을 알아채는 능력. 그 행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내 그릇을 키워두는 능력. 내 길의 어디어디쯤에 운이 찾아와 주길 은근슬쩍 바라면서, 가야 할 길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해 두는 능력.
p. 148
‘사람 목소리가 없으니까 라디오 같지 않아요’
바로 그거였다. 우리가 라디오를 좋아하는 이유. 라디오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MBC 파업 기간, 주구장창 노래만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던 적이 있다. 처음엔 쉼 없이 나오는 음악이 좋았지만, 분명 그게 라디오를 찾는 이유가 아니었단 걸 알게된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디오의 최전선에 있던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