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 브누아 페터스 글, 코린 캉탱 자문, 김희경 옮김
다니구치 지로의 인터뷰집이다. 이틀에 걸쳐 읽었는데, 다니구치 지로란 사람은 상상과는 좀 다른 사람이란 생각을 내내 했다.
심지가 굳은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으나, 따뜻한 컨텐츠를 차갑게 말하는 느낌이랄까.. 반듯하지만 따뜻한 그의 작화 스타일과 닮아있단 생각이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1년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도쿄에서 진행된 대담을 옮겨놓은 대담집이다. 2017년 다니구치 지로가 갑자기 타계한 뒤, 그를 추모하는 추가 서문을 붙여 2019년에 재편이 된 것 같았다. 손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순간까지는 계속 작업을 할 것 같다는, 다니구치 지로가 상상하는 본인의 미래를 담담하게 말하는 포인트에선 좀 숙여해지기도 했다.
그의 첫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도련님의 시대’는 메이지 시대 일본을 폭넓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마흔 살에 시작한 작품이었다. - 한국 독자들을 위해 새로 쓴 서문 (브누아 페터스)
박완서도, 다니구치 지로도 불혹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 갑작스런 등장이지, 그들이 보냈을 그 이전의 40년은 거대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해 조급한 마음이 들려 할 때,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목들. ‘누구도 그랬으니까’ 하는 비교가 아니라, 인고의 시간을 함께 버텨주는 동료같은 느낌이랄까.
번역 출간하며 좌철에서의 우철로의 변경, 칸의 재배치, 말풍선의 재배치. 이전에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작업들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inpainting 을 결합한 automation 도 가능하리라 생각되기도. 도련님의 시대는 너무 읽고 싶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인데, 간간히 책에 삽화로 삽입된 컷들을 볼 수 있었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 배경을 들어보니, 한층 다르게 보였다. 뭔가 다르다 생각했는데, 짚어내지 못했던 답을 명쾌하게 얻은 느낌이었다.
메이지 시대 분위기를 화면에 옮기면서 그림과 기법을 모두 혁신하고 싶었습니다. 메이지 시대를 묘사할 때면 대부분 화면을 어둡게 하는데, 전 오히려 밝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 시대 사진을 보면 대부분 어둡지만, 그건 당시 사진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도시에는 공해가 거의 없었을 테니 공기도 지금보다 훨씬 깨끗했을 테고, 현재 우리가 보는 오래된 건물들이 그때 막 건축되어 아주 산뜻했겠죠. 전 그런 근대성의 이미지를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전반적인 환경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활기차고 매력적이었을 겁니다. 전 이런 밝은 분위기를 살리려면 어떤 기법을 활용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얼굴을 그릴 때 긋는 선의 수를 줄였습니다. 단조로운 검은 색조를 피하고 처음으로 스크린 톤을 사용했습니다. 스크린 톤의 효과가 좋아서 이 기법 사용을 조금씩 늘렸습니다. 그리고 컷 수를 줄여서 컷 분할도 이전과 다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곧바로 효과가 나면서 그리는 방식도 달라졌죠. 이런 탐색과 시도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시간을 허비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p.78)
대담집에 삽입된 작품들의 orthographic perspective 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이 좋았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