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주 여행 내내 들고다니며 읽었다. 덕분에 제주 여행은 홀로 다녔단 느낌이 덜했으며, 풍성해졌다.
정말이지 무척이나 재밌게 읽었다. 어라 어어 나는 소설파인데 이게 이렇게 재밌어도 되나 싶을정도로. 감명깊었거나 훗 멋진 생각이라 생각하며 표시해둔 페이지도 너무 많아 나중에 정리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다큐시절부터 최근작까지 본인의 생각이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어놓았는데 글의 짜임새나 내용이 좋아 영화 감독이 아니었더라도 잘먹고 잘살았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글을 매력적으로 쓰는 사람이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매력적인 사람이라 매력적인 글을 쓴건지,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분명 고레에다 히로카즈란 사람을 곱씹게만드는 힘이있다. 이런 느낌은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나 느끼던 감정인데!
아무래도 나는 책의 내용에 나를 투영해 볼 수밖엔 없다. 어린시절 좋아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늘어놓은 그를 보며 나도 뒤돌이켜보면 텔레비전 마니아였는데, 어쩌다 영화로 넘어온걸까 나의 근간도 텔레비전인건가? 나는 프로도 아닌데 그런걸 따져서 어디다쓸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본인의 작품에 대한 설명 이외에도, 영화제나 제작, 테크닉, 예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전엔 영화제와 컨퍼런스는, 그리고 영화와 논문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비슷하단 생각을 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생각보단 많은 장수의 차이가 나구나 싶었다. 가령 논문엔 discussion 을 내놓으며 나만의 흑백이 명확한 결론을 지어야하는데 영화는 회색빛으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대한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하나의 라인으로 묶이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라인을 단적으로 느끼게 해준 대목은 바로 아우슈비츠와 서대문 형무소의 이야기였다. 아우슈비츠의 신발더미에서 소름을 느낀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는 단순한 모형과 비명소리만으로는 느끼지 못한 소름 이야기에서 그 보일락 말락하던 라인의 가닥이 실체로 드러난 것 같았다.
난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그가 의뢰받아 만든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래 그 만화가의 팬이었고 영화화하고 싶었는데 판권문제로 돌고돌다 후에 만들게 된 것이었다.
그가 동경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꽤나 많은 부분을 투자해 써놓았다. 동경의 대상이 동경하는 사람. 인류의 역사를 지탱하는 커다란 한 축은 그 끊임없이 내려오는 동경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제주의 한적한 바닷가 카페에 들어설때마다 이 책을 꺼내들었기에 왠지 앞으로 제주에서 파도소리와 고소한 커피향을 맡을때마다 난 어김없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쁘지 않은, (사실은 꽤 좋은!) 기념품을 만들어 두고온 느낌이든다. 좋았던 구절을 첨부한다. (양이 많아 저작권법이 걱정되는데… 책을 얼른 사고 지워야겠다.)
p.6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p.7
“모든 영화는 이미 만들어졌다” 라는 말이 진실인 양 떠돌던 1980년대에 청춘기를 보낸 사람은 ‘지금 내가 만드는 것이 과연 정말로 영화인가’라는 물음을 언제나 품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불안’도 피로 이어진 듯한 연대감도 모두 뛰어넘어, 순수히 그 강의 한 방울이 되기를 바랐다.
p.20~21
마침 그 무렵 저는 허우샤오시엔 감독도 만났습니다.
(중략)
“그런 이야기라면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좋아"라는 조언을 들어서, 저는 아직 찍지도 않은 영화를 베니스로 가져가기로 결심했습니다.
p.29
(영화제 관련 내용)
그래서 ‘결승점이 아닌 시작점’ 이라는 사고방식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p.30~31
(환상의 빛의 낭트 3대륙 영화제에서의 관객과의 대화 관련 내용)
또 이 영화는 꿈에서 시작하므로 제 해석으로는 꿈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은 어디부터 꿈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p.40
소리의 원근감은 카메라의 거리와 기본적으로는 같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시노자키 씨에게 배운 저는 <원더풀 라이프> 이후 소리와 영상의 조립을 중시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p.41
되돌아보면 그 무렵 저는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라는 존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가와 감독은 <영화를 찍다> 라는 책에서 “다큐멘터리란 피취재자의 ‘자기표현 욕구’를 찍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중략)
즉 취재자의 이렇게 찍고 싶다는 욕구와 피취재자의 이렇게 찍히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p.78
<환상의 빛> 주인공처럼 가슴 속 슬프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씩씩함이자 아름다움 아닐까요.
p.110
예전에 구메 히로시 씨가 뉴스 스테이션의 메인 캐스터로 활동할 때 NTT의 미공개주를 다루었더니 NTT가 스폰서를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구메 씨는 “오늘은 스폰서가 좀 다릅니다"라며 가볍게 불쾌함을 드러내는 코멘트를 했습니다.
p.155
본디 양론 병기란 보는 사람의 사고를 그다음으로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여 그다음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p.157
텔레비전을 보는 살마 가운데 “나는 후지TV는 싫어하지만 TV 아사히는 봐” 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재미있는 방송이라면 누구든지 볼 것입니다. 저는 그런 ‘뜻밖의 마주침’이 텔레비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므로 텔레비전 방송으로 작품을 본 사람의 사고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가려는 생각을 언제나 품고 있습니다.
p.183~184
그러나 그런 일련의 보도를 접하며 제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째서 소년은 동생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지 않았던 걸까요? 어느 날, 아동상담센터에서 보호 중이던 여동생이 중얼거린 “오빠는 다정했어요"라는 한마디를 신문 기사 제목에서 보고 제 안에서 싹텄던 의문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만약 어머니가 그저 신경질적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였다면, 장남도 동생들을 똑같이 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들 모자 사이에는 적어도 보도에서는 엿볼 수 없는 풍성한 관계가 구축되었던 시기도 짧을지언정 있지 않았을까요……
(중략)
그들 생활에는 물질적 풍요와는 다른 어떤 ‘풍요로움’이 존재했을 테고, 남매들 사이의 감정 공유가,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성장과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요.
p.187
그래서 역시 칭찬받는 것보다는 프로의 눈으로 제대로 읽어 달라고 해서 비판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190
<아무도 모른다>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태도로 찍기로 결심했습니다. 알기 쉬운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아니라 회색 그러데이션으로 세계를 기술하려 했습니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 우리가 사는 상대적 가치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p.217~218
집 내부의 어디가 현지 촬영이고 어디가 세트인지 몰랐다는 기쁜 감상도 들었는데, 이는 수준 높은 미술과 오노시타 에이지 씨의 훌륭한 조명 덕분입니다. 미타카의 소아과 의원은 볕이 매우 잘 들어서 자연광으로 찍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오노시타 씨는 구태여 인공광을 더했습니다. 어째서인지 궁금해서 이유를 묻자 “의도적으로 인공적인 빛을 더해서 자연광을 살짝 인공광에 가깝게 만들어 두지 않으면, 세트 촬영분과 합쳤을 때 한 영화 안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아요. 그 자리의 자연광이 아름답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광만으로 촬영해도 좋은 건 아닙니다” 라고 조명에 대한 철학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기술자란 정말로 멋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p.225
하지만 지금은 조감독은 액셀, 감독 조수는 브레이크라는 역할 분담을 서로 이해해서 양호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225
제 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실을 그린다"는 말을 듣지만, 저 자신은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p.284
(영화제 초청 관련 내용)
저는 그런 데는 별로 참가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호텔 방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DVD를 보지요. 이것은 이것대로 사치스러운 시간입니다.
p.295
텔레비전에 가장 결여된 것은 텔레비전 비평이다
p.381
제 이미지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세로축에 놓으면 죽은 자는 세로축에 존재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 아이는 같은 시간축에 있지만 수평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비평하는 존재라는 느낌입니다.
p.400~401
한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는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도 초대되었는데 그때 크게 납득한 점이 있습니다. 기자가 “오즈 야스지로와 닮았다’고 해서 아, 또 시작인가 싶 었는데 “시간이 흐르는 방식을 닮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이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시간이 돌고 있다. 직선적인 게 아니라 한 바퀴 돈 다음 조금 다른 곳에 착지한다. 그 점이 오즈의 영화와 닮았다"라고요. 그것은 매우 귀중한 발견이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영화의 시간을 그렇게 파악하고 있고 처음과는 다른 곳에 착지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일본인에게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있기에 시간이 순환한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일까 싶어서 “여기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순환한다는 감각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없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작품이 오즈의 작품과 달았다면, 방법론이나 주제가 아니라 시간 감각이 닮은 게 아닐지요. 일본인의 내면에 있는 원을 그리는 시간 감각.
(중략)
<환상의 빛> 무렵부터 계속 들어 온 오즈와의 공통점도 그제야 어쩐지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