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리송한 저자처럼, 아주 아리송한 책이다. 딱봐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글인데, 자꾸 날카롭게 나를 찌른다. 아주 기분이 이상하다.
기분이 이상한 이유는 아마 저자와 나의 비슷한 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병뚜껑을 모아 뒤에 날짜와 장소를 적어놓는다든가, 여행하며 좋아했던 도시들, 추억들 그리고 사람들이 오버랩되어 계속 즐거웠다.
특히나 가장 즐거웠던건 엑상프로방스를 떠올릴 때였다. 라스연에서 통영에 내려가는 길에 그 대목을 읽고 있었는데, 낮에 혼자 엑상 프로방스를 헤집고 다니며 즐거운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가지 좋았던 대목들을 남겨본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 첫 글을 읽다가 다시 덮어버렸다.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 이건 반칙 아닌가. ‘행복의 충격’이 준 충격도 아직 다 흡수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가 이걸 소화할 능력이 되는가. 이 아름다움은 내 것이 되어도 되는가.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그 왜곡을 찾아 더 새로운 곳으로, 누구도 못 가본 곳으로, 나만 알고 싶은 곳으로 끊임없이 떠난다. 그렇게 떠난 그곳에선 골목마다 프리마돈나가 노래를 한다. 이름 모를 클럽마다 라디오헤드가 연주를 한다. 나뭇잎까지도 사각사각 잊지 못할 소리를 들려준다. 햇빛은 또 어떻고. 들어본 적 없는 음악들로 세상이 넘쳐난다.
나이라는 건 저절로 도착하는 정거장 같은 건데 나는 자꾸 빠른 열차를 타고 싶었다. 빠른 열차로 60이라는 나이에 도착해버리고 싶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마음을 뒤로하고, 정처 없이 상처받는 시간을 모른 척하고.
더 이상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대신 해마다 도착하는 그 나이의 색깔을 기다린다. 모두가 지니고 있는 바로 지금의 색깔에 열광한다.
여리고 미숙하거나 닳고 바래거나 모든 나이에는 그 나름의 색깔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색깔이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선배도 만날 거고, 나쁜 선배도 만나게 될거다. 하지만 후배의 유일한 특권은 좋은 선배의 좋은 점은 배우고, 나쁜 선배의 나쁜 점은 안 배우면 된다는 거지.
(병뚜껑을 모으는 부부가) 그렇게 많이 모았는데, 아직도 없는 병뚜껑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중략…) “우리는 바다에서 조개를 줍는 소년일뿐…”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남나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